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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아레오바고 설교 – 세속 도시에 울려퍼진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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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의 한국어 번역은 "안"입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진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지난 주일 3부 예배를 마치고 5박 7일간 다녀온 인도네시아 선교 여정 가운데, 이 질문이 마음 깊이 남았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9월 첫 번째 주일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번 선교는 여러분이 성경책 천 권을 보내주시고 기도로 함께해 주신 덕분에 뜻깊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그 여정 가운데 마음에 새긴 질문으로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인도네시아 순바섬에서 발견한 명목상 신앙의 그림자

작년에 인도네시아 순바섬을 방문했을 때, 성도들에게 성경책이 없다는 사실이 의아했습니다. 알고 보니 인도네시아는 주민등록증에 여섯 개 공식 종교 중 하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는데, 공산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제도 때문에 사람들은 불이익을 피하려고 아무 종교나 선택해야 했습니다. 순바섬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개신교란에 동그라미를 많이 쳤고, 그 결과 명목상의 개신교인은 많지만 성경책도 복음도 모르는 이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고, 올해 교회 오십 주년을 맞아 천 권의 성경책을 그 땅에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마을마다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돌짝밭 같은 마음도, 길가와 같은 마음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 반드시 옥토 같은 마음이 있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한국 교회에도 있는 명목상 신앙

그런데 이는 인도네시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종교를 물으면 그냥 개신교라 답하지만 말씀을 읽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명목상 신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번 한 달 우리 교회의 주제는 ‘복음과 생명 문화’입니다. 세속 문화 속에서 어떻게 복음이 진짜 생명이 되는지, 그 첫 본문으로 사도행전 17장,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당신은 무엇에 격분하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와 베리아를 거쳐 아테네에 도착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에 따르면,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며 아덴에 머무는 동안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습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삼만 개 이상의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관광객이라면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사진을 찍었겠지만, 바울은 관광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격분했습니다.

이 ‘격분’이라는 표현은 매우 과격한 감정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와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백성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격분하신 장면에서도 같은 단어가 쓰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거룩한 빡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분노 자체가 아니라 그 분노를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입니다. 바울은 거룩한 분노를 복음 전파의 동력으로 삼아 회당과 아고라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를 ‘말쟁이’라 조롱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반응한 이유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레오바고 법정과 아테네를 지배한 두 철학

아테네 사람들은 이상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했습니다. 낯선 가르침을 전하는 바울이 눈에 띄자 사람들은 그를 아레오바고 의회로 데려가 심문했습니다.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17:21)는 말씀처럼, 지적 유희를 즐기던 이 귀족들 앞에서 바울은 오히려 예수와 부활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시 지배적이던 두 철학파가 있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불안 없는 상태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며 적당한 쾌락과 평정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의 ‘소확행’과 유사합니다. 스토아 학파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 ‘아파데이아’를 추구하며, 우주가 이성적 원리 ‘로고스’로 구성되어 있고 이성에 따라 살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우주 자체를 신으로 여기는 범신론에 가까운 사상이었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 이 두 학파가 오늘날 우리 문화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에피쿠로스주의는 ‘욜로(YOLO)’라는 소비 문화로, 스토아주의는 자기계발 우상으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쾌락의 허무함에 갇힌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구원하려는 지친 도덕주의자에게는 값없는 은혜를 줍니다.

범신론과 불가지론이라는 두 가지 회피

바울은 22절에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말하며 논리를 자신에게로 이끕니다.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은 선악을 구분할 필요를 없애고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산과 바다는 영적일 수는 있어도 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로마서 1장 25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 새긴 제단을 보고,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며 비겁한 불가지론을 걷어내고 확실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27절은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팔짱 끼고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가지론자들이 신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지게 될 도덕적 책임과 헌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면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사람들은 차라리 어둠 속에 머무는 편을 택합니다.

부활,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

바울은 30절과 31절에서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석가모니도, 마호메트도, 공자도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예수께서 장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확증해 주신 믿을 만한 증거입니다.

나는 선택받았다 – 필자의 간증

저 역시 대학 시절 ‘모든 길이 하나님께 통한다’는 종교다원주의를 두고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다시 만난 뒤 깨달은 것은, 많은 길 중 하나를 받는 것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는 단 하나의 길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그 유일한 길을 내어 주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구원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인격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신 것입니다.

불모지에서도 열매는 있다

사도행전 17장 34절은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고 전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삼천 명이 회심했지만, 아테네에서 바울의 설교에는 단 몇 사람뿐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천 명을 만나고 성경 천 권을 전했지만, 그 가운데 몇 명이 주님께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분명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같은 이들이 있을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믿을 만한 증거입니다. 쾌락과 이성의 통제 속에서 스스로 주인 되어 사는 삶이 똑똑해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결코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오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그 복음에만 있습니다. 이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한 주간 되시길 바라며, 다음 주일 예배에서 인도네시아 선교의 더 자세한 이야기와 함께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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