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anseoug

  • 시편 133편, 형제 연합의 복 – 보배로운 기름처럼 복스러운 이슬처럼

    남극의 황제펭귄은 영하 50도의 혹독한 겨울을 ‘허들링’이라는 방법으로 견뎌냅니다. 수백 마리가 바짝 붙어 서로 벽이 되어주고, 안팎을 순환하며 체온을 나눕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펭귄처럼 단순하게 서로를 품게 만드셨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함께 살면서도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펭귄만도 못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순환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일까요? 오늘 시편 133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통해 형제의 연합이 왜 그토록 어렵고, 동시에 왜 그토록 아름다운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형제 갈등의 역사와 사랑의 비용

    시편 133편 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드는 열두 지파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 시를 지었습니다. 사사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파 간의 지긋지긋한 갈등을 마무리하고, 마침내 하나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목격한 감격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 형제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첫 살인의 비극을, 이스마엘과 이삭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을, 에서와 야곱은 장자권을 둘러싼 다툼을, 요셉의 형제들은 배신을 남겼습니다. 형제의 연합은 성경 어디서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연합’이라는 단어는 하모니, 곧 화음을 뜻합니다. 오케스트라가 조율할 때는 소음에 가깝지만 지휘자의 손끝에서 하나의 화음이 됩니다. 성경 원어로 ‘아름다운고’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실 때 쓰인 바로 그 단어, ‘토브’입니다. 형제의 연합은 창조의 아름다움에 견줄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연합의 비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라”(마 5:39-41). 이는 갈등을 끝까지 끌고 가는 비용보다, 먼저 사랑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게 든다는 말씀입니다.

    한국 사회의 갈등 비용이 GDP의 최대 27%에 달한다는 통계처럼, 우리는 지불하지 않아도 될 비용을 너무 많이 치르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가족이나 친척 중에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당장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를 위해 기도 한마디, 빈말이라도 좋은 말 한마디를 건네보십시오. 그것이 시작입니다.

    보배로운 기름처럼

    2절은 아론 제사장의 위임식 장면을 그립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향유가 머리에서부터 수염을 타고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모습, 대제사장 한 사람이 온 지파를 대표하는 이 장면이 다윗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기름부음은 야곱의 돌베개 사건(창 28:18)에서 처음 등장하며, 하나님께 성별되고 구별됨을 뜻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기름부음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때 우리도 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연합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있는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성령으로 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복스러운 이슬처럼

    3절 전반부는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헐몬산의 눈과 이슬은 건기에도 땅을 적시고 만나와 함께 광야를 채웠던 은혜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32장에서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라고 노래했고, 다윗 역시 성전으로 올라오는 백성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슬처럼 맺히는 것을 보며 감격했습니다.

    거기서, 영생의 복을 명령하시다

    3절 후반부,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어쩌면 ‘거기서’일 것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산이나 시온산 자체가 아니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복을 명령하십니다.

    옆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데도 사랑하려 애쓰는 그 자리, 손해를 보면서도 견뎌내는 그 가정, 갈등이 있어도 사랑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그 교회 공동체,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광야의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것을 먹은 이들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만나와 달리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의 떡이 되시어, 그를 믿고 받아먹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뺨을 맞아도 겉옷을 내어주어도, 그 사랑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며 살아가는 자리에 주님은 복을 명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번 주일예배에서 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름부음의 은혜를 함께 나누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자리로 함께 나아가시길 초대합니다.

  • 라합의 붉은 줄 의미 – 여호수아 2장 설교, 언약의 소망을 붙잡으라

    라합의 붉은 줄 의미 – 여호수아 2장 설교, 언약의 소망을 붙잡으라

    창문에 매달린 한 줄기 붉은 줄.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아우성이 가득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 붉은 줄은 홀로 휘날리며 한 집안을 살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창문에는 어떤 붉은 줄이 매달려 있습니까? 오늘 새벽 우리가 나눈 여호수아 2장의 말씀은, 40년 전 실패했던 정탐 사건이 어떻게 다시 반복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방 여인 라합이 어떻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붙잡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구원을 얻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로서 곁에서 모든 것을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아들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한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의 일은 지식이나 경험, 자본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머물러야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열 명의 악평과 두 사람의 확신

    40년 전,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의 대표 열두 명을 정탐꾼으로 보냈습니다. 합리적이고 정당해 보였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열두 명 중 열 명은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지만 거인들 때문에 이길 수 없다고 악평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다수의 악평을 따랐고, 그 결과 40일의 정탐이 40년의 광야 생활로 바뀌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그때 정탐꾼이었던 여호수아는 이번엔 단 두 사람만을 보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지난 역사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확신을 붙잡고 결단했습니다.

    라합의 고백과 헤세드

    여리고성에 들어간 두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건 선택을 했습니다. 발각되면 자신과 집안 모두가 끝나는 일이었지만, 라합은 이미 역사의 흐름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방 여인이었던 라합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것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며 헤세드(חֶסֶד), 곧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요청합니다. 자격 없는 자를 선하게 대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었습니다. 라합이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보호했듯, 이스라엘도 목숨을 걸고 그녀의 집안을 지켜야 하는 언약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이 언약을 가장 닮은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교회 역시 법이 아니라 언약으로 묶인 공동체입니다.

    창문에 매인 붉은 줄, 소망의 표

    언약에는 늘 증표가 있습니다. 라합과 정탐꾼의 언약의 증표는 붉은 줄이었습니다. 원어로 ‘티크바’, 곧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전쟁의 한복판,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아우성이 가득한 가운데서도 이 붉은 줄은 창문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린 것처럼, 이 집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헤세드를 베푸신 집임을 나타내는 표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붉은 줄을 매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언약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며, 그 어떤 전쟁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소망의 깃발, 승리의 깃발이 있습니다.

    이웃 사랑으로 완성되는 언약

    하나님을 선대하는 방법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라합의 집안 사람뿐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가족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은 세상에 있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우리 마음의 창에 붉은 줄을 다시 매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선대하신 것처럼 이웃을 선대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음 예배에도 함께 모여 이 소망을 나누며, 우리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세워지기를 기대합니다.

  • 모세의 마지막 걸음, 신명기 34장이 우리에게 남긴 것

    모세의 마지막 걸음, 신명기 34장이 우리에게 남긴 것

    느보산 비스가 산꼭대기에 서서 강 건너 약속의 땅을 바라보지만, 끝내 그 땅을 밟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강 하나만 건너면 평생 기다려온 가나안 땅인데, 왜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거기서 멈추게 하셨을까요? 그 답을 찾아가다 보면, 뜻밖에도 우리 자신의 사명과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 오경의 마지막 장인 신명기 34장을 통해, 사명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강 이편에서 저편을 바라보는 모세

    신명기 34장에서 모세는 모압 평지 느보산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 요단강 서쪽, 약속의 땅 가나안과 첫 성읍 여리고를 바라봅니다.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쪽은 ‘이쪽’, 서쪽 가나안 땅은 ‘저쪽’이라 불렸습니다. 마치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에서 강남을 바라보며 마지막 설교를 하는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강 이편에 있고, 다음 세대가 그 강을 건너 저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내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눈앞에 약속의 땅을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위대한 지도자의 시대가 여기서 막을 내리는 모습은, 인간적으로 보면 참 서운하고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막으셨을까

    그 이유는 민수기 13, 14장 가데스바네아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두 명 중 열 명이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들은 거인 같다”며 악평을 쏟아냈고, 백성들은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 선언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고백한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죽음 역시 이 불신앙의 세대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모세 역시 그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수명과 은혜의 장치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만약 모세가 500년, 천 년을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새 이론이 옛 이론을 이겨서 과학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옛 이론을 믿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과학이 바뀐다”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500년을 살았다면 양자역학의 시대는 지금처럼 빨리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수명이 수백, 수천 년이 된다면 우리는 더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고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에, 위대한 모세의 역사마저도 느보산 꼭대기에서 멈추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유한한 수명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의 장치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이 땅의 끝이 전부가 아닌, 영원한 천국을 향한 소망이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마침내 건너가야 할 천국의 예표였습니다.

    왜 하필 여호수아였을까

    출애굽기 33장 11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를 나눈 뒤 진으로 돌아갈 때도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회막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했던 여호수아의 손을 들어 다음 리더로 세우셨습니다. 경험이 쌓인다고 저절로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가 지혜를 얻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신명기 34장 5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9절은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여호수아를 통해 계속 이어졌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우리의 차례

    모세, 여호수아, 그다음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의 차례입니다. 한 세대는 지나가고 또 한 세대가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오래 살지 못한다고, 나의 시대가 저물어 간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면 건너가고, 그 자리에서 멈추라 하시면 멈추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몫을 감당하고, 역사는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의 눈으로는 미완성처럼 보이는 그 마침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거룩하고 온전한 완성이었습니다. 허무한 세상의 역사 대신 영원한 생명을 끝까지 붙잡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소망을 품고, 이번 주에도 함께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 베드로전서 4장 강해 – 마지막 때 교회가 사는 법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로마의 박해를 피해 도망치던 베드로는 반대편에서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십자가를 지시려 로마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 짧은 만남 이후,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로마로 들어갔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두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때는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 곧 2천 년 동안,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베드로전서 4장 7~11절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아멘.”

    박해의 시대, 베드로가 쓴 편지

    베드로전서는 갈대라는 뜻의 ‘시몬’에서 바위라는 뜻의 ‘베드로’로 이름이 바뀐 사도가, 노년에 초대교회를 향해 쓴 편지입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AD 64년 로마 대화재 사건 이후, 네로 황제는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기독교는 신흥 이단처럼 여겨졌고, 성찬을 오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식인 종교’라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콜로세움에서 맹수의 먹잇감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인간 횃불로 사용되는 참혹한 일까지 당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베드로는 유언과 같은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은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쿠오바디스 – 도망치지 않는 부르심

    ‘마지막’이라는 헬라어 ‘에스카토스’는 역사의 결말 부분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마지막이라는 말에 저마다 다르게 반응합니다. 어떤 이는 쾌락에 빠지고, 어떤 이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합니다.

    앞서 나눈 베드로의 일화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로마의 박해가 심해지자 성도들은 베드로에게 피신을 권했습니다. 베드로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이유였습니다. 마지못해 로마를 떠나던 그는 반대편에서 오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다시 십자가를 지시려 로마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처럼 죽을 자격조차 없다 하여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병상에서 만난 희망

    최근 교통사고로 6개월째 병상에 누워 계신 한 성도님을 심방했습니다. 기도에 관을 삽입해 말도 잘 못하시고, 한쪽은 마비되어 힘드셨지만 정신은 또렷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말 죽고 싶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쭤보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살려두셨을까요? 머리가 살아 있기에 몸도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얼굴에 희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옆 침상의 다른 환자분도 부러웠는지 자꾸 저를 부르셨습니다. 낫으면 교회에 나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병상에서든 박해의 자리에서든,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감당하라고 말씀합니다.

    목적으로서의 마지막, 그리고 복음의 기회

    ‘에스카토스’에는 시간의 순서만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33년을 사셨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몇 년을 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의 시간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국제사역부가 시작되어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주변 캠퍼스의 외국인 학생들도 함께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시대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결말을 아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 교회가 사는 법 – 기도, 사랑, 대접, 봉사

    오늘 본문은 마지막 때 교회가 살아가는 네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겟세만동산에서 “깨어 기도하라” 부탁받았지만 실패했던 베드로는 이 말씀을 쓰며 자신의 실패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원어는 ‘구원’과 ‘생각’의 합성어로, 우리의 생각을 구원해내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영이 깨어날 수 없고, 영이 깨지 않으면 세상 문화에 휩쓸리게 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습니다. ‘뜨겁게’라는 원어는 현악기의 줄을 끝까지 팽팽하게 당기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나오는 호르몬 옥시토신은 혈관을 넓히지만, 미워하고 외로울 때는 혈관이 좁아진다고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반복적으로 덮어줍니다.

    셋째, 대접입니다. ‘대접’의 원어는 ‘사랑(필로스)’과 ‘나그네(크세노스)’의 합성어로,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랑을 뜻합니다.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오가는 사역자들을 성도의 가정에서 대접해야 했습니다. 잠자리뿐 아니라 식사까지 챙겨야 했으니 그 수고가 자칫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나그네를 원망 없이 사랑하고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환대이며,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실천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대접을 실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차량 봉사, 주방 봉사, 목요일 아브라함의 식탁 후 설거지까지 자기 시간을 쪼개어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 청소를 위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든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원망 없는 섬김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대접이며, 이것이 교회를 세워갑니다.

    넷째, 봉사입니다. 은사는 재능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며 마음의 감동입니다. 청지기는 소유권이 아닌 관리권만 가진 자입니다. ‘봉사(디아코노스)’는 먼지 날리며 섬기는 종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동호회가 아니라 동역회입니다. 동호회는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모임이지만, 동역회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재능을 가지고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섬기는 자리입니다. 미용 봉사팀이 기도로 시작해 요양원 어르신들을 섬기고, 독서 모임을 통해 새 신자가 등록하는 등 다양한 섬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결론 – 오직 하나님께 영광

    본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기도하고,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생각하며 기도하라 권면했고, 자신의 부족한 사랑을 생각하며 뜨겁게 사랑하라 권면했습니다.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우리를 향한 진심 어린 당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도 위축되지 말고 하던 대로 하십시다.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원망 없이 대접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십시다. 이것이 마지막 때 교회가 사는 법입니다. 다음 주 예배에도 함께 나와 이 은혜를 나누시기를 소망합니다.

  • 요한일서 1장, 성육신의 의미 – 생명의 복음으로 오신 로고스와 인도네시아 선교 현장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를 보면, 그 안의 신들은 인간처럼 질투하고 분노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성경도 하나님을 질투하고 분노하는 분으로 묘사하지만, 그것은 인간과 같은 선상의 감정이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요한일서를 통해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생명의 복음으로 오신 로고스’입니다. 일부러 ‘말씀’이라는 번역어 대신 원어 그대로 ‘로고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로고스는 철학의 원리가 아니라 생명이다

    요한일서 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세기 후반, 스토아 철학이 대중적 인기를 끌던 시대에 ‘로고스’는 낯설지 않은 평범한 단어였습니다. 사람들은 로고스를 우주의 원리, 하나의 이치로 이해했고, 인간에게도 작은 로고스가 있어 이성으로 사고한다고 여겼습니다. 신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원리이며,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고스가 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요한 자신은 태초에 있지 않았지만, 3년간 함께했던 예수님이 바로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심을 깨닫고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보고 만졌다”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곧 원리가 아니라 로고스가 성육신하셨다는 선포입니다.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복음

    당시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활발히 퍼져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특별한 영적 지식과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로고스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그 은혜를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특별한 지식을 얻어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결국 나 중심의 구원일 뿐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을 강조하고 육을 무시하는 이원론에 빠져, 예수가 실제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가 육체로 나타난 것처럼 ‘가짜로 현현’했을 뿐이라는 가현설(도세티즘)을 주장했습니다. 이와 닮은 현대의 위험이 구원파적 사고입니다. 깨달음을 절대화하고, 죄와 회개를 축소시키며, 성화의 과정과 거룩해져 가는 삶의 책임을 축소시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란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구원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까?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천국에 이르기까지 죄와 싸우는 영적 전쟁입니다.

    성육신, 역사 속으로 오신 로고스 – 성경 번역의 역사

    요한일서 1장 2절은 말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그 생명이 이 땅에, 1세기 팔레스타인의 한 유대인 남자로, 아람어를 사용하며 구체적인 역사 속에 오셨습니다.

    이 성육신의 과정은 우리나라 성경 번역의 역사와도 닮아 있습니다. 쇄국 정책의 조선 땅에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며 전한 중국어 성경, 존 로스와 서상윤의 한글 누가복음, 이수정 선생의 마가복음 번역을 통해 말씀이 우리 언어로 들어왔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는 자유와 평등,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이해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로고스가 우리의 언어와 문화 속으로 들어오신 것은 낮아지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으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코이노니아, 공통점을 찾아가는 선교 – 인도네시아 순바섬 현장

    요한일서 1장 3~4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귐’은 원어로 ‘코이노니아’, 곧 공통점(코이노스, common)을 찾아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번의 깨달음이 아니라, 주님과의 공통점이 점점 많아지며 인격이 변화되어 가는 성화의 여정입니다.

    이번 인도네시아 순바섬 선교에서 그 코이노니아를 생생히 목격했습니다. 고아원 아이들은 한국어 찬양을 완벽히 외워 불렀고, 유학 경험 없는 현지 청년들이 훌륭히 통역을 해냈습니다. 700여 명이 모인 집회에서는 많은 이들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다리가 뒤틀린 아디 목사님은 오토바이로 6~7시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고, 도벽이 있었던 한 청년은 존재 가치를 깨닫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비포장길 산골 마을에서는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성경책을 받으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온몸을 떨며 앉지도 못했던 한 고등학생은 팀원들의 기도 후 일어나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순간이 로고스가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코이노니아의 현장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목사님들의 옷에는 마태복음 9장 35절이 쓰여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바로 그 말씀이 우리가 그곳에서 행하고 있던 사역 그 자체였습니다.

    먼저 찾아오신 사랑

    요한일서 4장 10절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어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딘가에 도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신 계시를 믿고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이성도, 감정도, 의지도 스스로 거룩함에 도달할 만큼 순수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뿐입니다. 남과 북 사이에, 우리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그 공통점을 찾아가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번 주에도 우리 가운데 오신 로고스, 생명이신 그분과의 코이노니아를 사모하며 다음 예배로 함께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 신명기 25장,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 사랑의 정신

    일을 하는 존재는 그 수고의 대가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눈앞의 작은 이득 때문에 함께 일하는 이의 입을 막아버리곤 합니다. 신명기 25장은 재판과 태형의 규정부터 시작해, 아주 사소해 보이는 소 한 마리의 이야기까지 다루며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넘지 말아야 할 선, 태형 40대 규정

    신명기 25장 1절부터 3절은 재판장이 죄인에게 태형을 내릴 때 40대를 넘기지 못하도록 규정합니다. 아무리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40대 이상의 매를 맞으면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자리에 선 사람이 교만해져 정도를 넘어서지 않도록 분명한 한계를 그어 놓으셨습니다.

    유대인의 구전 전승인 미쉬나를 보면 실제로는 39대만 구형하도록 했고, 매질은 신체 세 부위에 균등하게 나누어 시행했습니다. 집행 전에는 재판관과 의사가 죄수의 건강 상태를 진찰해 견딜 수 있는 매의 수를 정했습니다.

    형 집행 중 죄수가 기절하면 즉시 중단하고 석방했습니다. 그렇게 형을 마친 사람은 죗값을 온전히 치른 것으로 간주되어 누구도 그를 조롱할 수 없었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말씀이 바로 “내 형제를 경히 여기지 못할지니라”(신 25:3)입니다.

    매질에 사용된 채찍은 소가죽과 나귀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이사야 1장 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이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짐승도 주인을 알아보니, 매를 맞으며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깨달으라는 뜻이 담긴 것입니다.

    당신은 함께 일하는 존재를 도구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4절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고대 근동에서는 소가 타작 마당의 곡식단을 밟아 알곡을 골라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가 발밑의 볏짚과 낟알을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까워 소의 입에 망을 씌우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금하십니다. 함께 땀 흘려 일한 짐승에게 최소한의 몫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 인색함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동물 복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자기 이득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신과 관계없다고 여기는 모든 존재를 도구화합니다. 설교 중 나눈 예화처럼, 동물을 착취의 대상으로만 다루거나 사람을 인격이 아닌 노동력으로만 취급했던 사건들은 그 도구화가 얼마나 잔인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가해자들 중에는 자기 집 반려동물은 극진히 아끼면서 정작 함께 일하는 사람은 학대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가 결국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결정짓습니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회의 인권 감수성이 드러난다는 것은 여러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어 왔습니다. 곡식 떠는 소의 입장까지 헤아릴 줄 아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역자를 존중하는 교회의 문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 말씀을 다시 꺼냅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고전 9:9-10). 당시 고린도 교회 일부 교인들은 바울이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사도라면 청빈하게 아무것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성전의 일을 하는 자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목회자에게 청빈을 요구하며 사례를 인색하게 대하는 풍토가 은근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인을 봉양하지 않아 결국 레위인들이 자기 직분을 버리고 떠났고, 그 결과 말씀을 가르칠 자가 사라져 백성이 우상숭배와 혼란에 빠졌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위하고 교회는 목회자를 위하는 아름다운 문화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일상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넘치는 은혜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십시오. 눈앞의 작은 이득만 생각하며 함께 수고하는 이의 몫을 빼앗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얼마나 더 모으느냐보다, 나와 함께하는 생명 가진 존재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랑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사소한 일상까지 지켜보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 사랑을 실천할 때, 몇 알의 곡식이 아니라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다음 주일 예배에서 함께 그 은혜를 나누기를 기대합니다.

  • 정의와 자비의 하나님 법, 신명기 24장 묵상 – 여백을 남기는 삶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지는 부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의 손에서 마지막 생계 도구까지 빼앗기는 상황.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이런 장면들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개입하고 계실까요? 오늘 새벽 우리는 신명기 24장을 통해, 정의와 자비를 함께 붙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결혼과 가정의 기초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법

    신명기 24장 1절은 이혼 상황에서도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명합니다. 그냥 헤어질 것을 왜 굳이 증서를 써야 했을까요? 이는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도록 숙려 기간을 두고, 공동체 안에서 공증받게 함으로써 이혼의 남발을 막고 생존권이 흔들리기 쉬운 여성을 보호하려는 장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혼 자체가 하나님의 본래 뜻은 아니지만,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약자를 배려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위자료와 양육비 제도 역시 같은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5절은 더 놀랍습니다. 새로 결혼한 사람은 1년 동안 군대에 가지 않고 아내를 즐겁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결혼 후 1년은 부부의 기초를 세우는 결정적인 시기이기에, 국가의 일보다 가정의 일을 더 중히 여기신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이 양가의 입장 차이나 예식 문제로 갈등할 때가 많은데, 이 시기에 서로 얼마나 양보하고 배려하느냐가 이후 가정 전체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결혼식 하루의 작은 준비 하나조차 부부가 함께 마음을 맞추어가는 과정이듯, 신혼 1년을 국가의 일보다 귀하게 여기라 하신 말씀은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하며 기초를 다지라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생계 수단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법

    6절은 생계 도구인 맷돌을 전당 잡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루 벌어 사는 사람에게 생업 수단을 빼앗는 것은 곧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누군가의 생계를 담보로 삼거나, 벼랑 끝에 몰린 이의 마지막 밥줄까지 흔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금하신 일입니다. 부자는 나눌 줄 알고, 가난한 자는 스스로 일어설 기회를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 이것이 신명기 24장이 말하는 도덕의 기본입니다.

    사람의 존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법

    7절은 인신매매를 엄히 금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이었다가 법으로 옭아매어져 결국 몸까지 팔리는 신세가 되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법은 잘못 사용되면 약자를 착취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같은 민족끼리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13절은 전당물을 밤에는 반드시 돌려주라고 말씀합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그 옷을 덮고 자며 빌려준 사람을 위해 축복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건을 돌려주는 것을 넘어, 도움을 받는 사람조차 존엄을 잃지 않고 오히려 축복을 흘려보내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함입니다. 얼마 전 91세로 소천하신 제인 화이트 선교사님이 떠오릅니다. 26살에 한국에 오셔서 결혼도 하지 않고 65년을 이 땅에서 헌신하셨습니다. 그분이 평생 베푼 사랑은 수많은 이들의 기도로 되돌아왔고, 그 기도는 곧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복이 되었습니다. 전당물을 돌려받은 이의 축복이 결코 헛되지 않듯, 은혜를 베푼 삶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16절은 연좌제를 금하십니다.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자식을 볼모로 잡는 통치 방식은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이용하는 무서운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법을 절대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무질서한 이유도 결국 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법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이 우리 발의 등불과 길의 빛이 됩니다.

    여백을 남기는 삶, 정의와 자비의 균형

    19절 이하는 밭의 곡식 한 뭇, 감람나무의 남은 가지, 포도원의 남은 열매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고 말씀합니다. 다 가지지 말고 일부를 남겨두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시대는 정의만을 외치지만, 정의만으로는 세상이 온전히 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이 둘이 상충되지만, 하나님은 당장의 손해가 반드시 갚아질 것을 약속하시며 이 둘을 함께 이루라 하십니다. 정의와 사랑을 함께 실천하는 공동체가 될 때, 하나님은 복에 복을 더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밭의 곡식 한 뭇을, 나무의 남은 가지를, 포도원의 남은 열매를 이웃을 위해 남겨두는 여백의 삶으로 초대받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도 말씀을 삶의 법으로 붙들고 살아가며, 다음 예배에서 은혜를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못 본 체하지 않는 공동체 — 신명기 22장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

    내 옆에 있는 형제의 어려움을 나는 얼마나 자주 못 본 체하며 지나쳤을까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진실이 끝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시점, 신명기 22장은 하나님이 세우기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이 질문에 답을 건넵니다.

    못 본 체하지 말라 —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공동체

    신명기 22장 1~4절에는 ‘내 형제’와 ‘못 본 체하지 말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길 잃은 나귀, 잃어버린 의복, 길에 넘어진 소를 보고도 모른 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시대에 가축은 어마어마한 재산이었습니다. 표식이 되어 있어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있었지만, 그냥 두면 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도둑에게 넘어가 형제에게 큰 타격이 됩니다.

    핵심은 분명합니다. 공동체 안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외면하면 그 어려움이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온다는 경고입니다.

    섞지 말라 — 순리와 창조 질서를 지키는 공동체

    이어지는 5~12절은 남녀의 옷을 바꿔 입는 것,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는 것,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 매는 것,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짜는 것을 금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엔 사소하거나 오히려 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효율이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우리의 판단보다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당장은 유익해 보여도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의 이익과 하나님의 원리가 충돌할 때는 사람의 생각을 꺾어야 합니다. 얼핏 상관없어 보이는 ‘외면하지 말라’와 ‘섞지 말라’는 말씀은 사실 하나로 연결됩니다. 옆에 앉은 형제의 어려움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섞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 — 억울한 자가 외면받지 않는 공동체

    13~19절은 한 남편이 아내를 미워해 거짓 소문으로 이혼하려 한 사건을 다룹니다. 처녀의 아버지는 정절의 증거를 가지고 성문 장로들에게 나아가고, 장로들은 진실을 밝혀 남편을 벌하고 아내의 명예를 회복시킵니다.

    반면 20~21절에서는 남편의 의심이 사실로 밝혀진 경우, 하나님은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반드시 제하라 하십니다.

    이 두 사건은 각기 다른 결말이지만 결국 같은 진리를 향합니다. 거짓은 끝내 숨을 곳이 없고, 공동체 안에서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우리를 이 진실 싸움에 홀로 서게 하지 않으시고 함께할 사람들을 붙여 주십니다.

    세밀히 살피시는 공의 — 약자가 보호받는 공동체

    22~29절은 여러 정황을 세밀히 구별하여 다룹니다. 약혼한 여성이 성읍 안에서 다른 남자와 관계했다면 둘 다 벌하십니다. 성읍 안이라는 것은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고, 소리 질러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면 이는 불가항력이 아니라 스스로 허용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성이 인적 없는 들에서 강간을 당했다면, 소리를 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을 것이기에 남자만 벌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상황을 뭉뚱그려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처했던 구체적 정황과 소리 지를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세밀히 헤아려 누가 약자이고 누가 선을 넘었는지를 가려내십니다. 이 모든 판결이 향하는 곳은 한 방향입니다. 약자는 보호받고, 강자는 더 큰 책임을 지며, 도움받을 수 없는 상황까지도 하나님이 헤아리신다는 사실입니다.

    나가며 —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공동체를 향한 초대

    신명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를 다스리시기에 악은 반드시 멸망하고, 거짓은 드러나며, 공의는 반드시 집행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공동체, 창조의 질서를 지키는 공동체, 억울한 자가 외면받지 않는 공동체, 약한 자가 보호받는 공동체.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이 공동체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신약의 언어로 말하면, 우리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우리 각 사람이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며, 이번 주 예배 가운데 우리 옆의 형제와 자매를 못 본 체하지 않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예배에서 이 은혜의 자리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신명기 21장 십자가 복음 – 대신 흘린 피, 대신 달린 나무

    신명기 21장 십자가 복음 – 대신 흘린 피, 대신 달린 나무

    들판에서 누군가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아무도 그 범인을 모릅니다. 이 죄책은 누가 짊어져야 할까요? 신명기 21장은 이 낯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오래된 율법 조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깊이 맞닿아 있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왜 이 사건이 십자가와 연결되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죄의 대가는 피로 갚아야 한다

    신명기 21장 1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죄의 대가는 피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범인을 알 수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 목을 꺾어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그 피 흘림의 죄책이 공동체에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조치였습니다. 장로들은 그 송아지 위에서 손을 씻으며 고백합니다.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아무것도 모르는 암송아지의 피를 통해 공동체의 죄가 속죄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말씀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죄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생명, 곧 피로 덮어야 씻겨집니다.

    암송아지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

    아무 잘못도 없는, 멍에조차 메어보지 못한 암송아지가 성읍 사람들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고 목이 꺾여 피를 흘린 것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어린 양께서 우리의 알지 못하는 은밀한 죄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책을 담당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하물며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암송아지의 피가 육체를 정결하게 했다면, 흠 없으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양심까지 깨끗하게 하십니다.

    원래는 내가 죽어 내 피로 속죄를 해야 했지만, 나 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대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그냥 ‘피’라 부르지 않고 ‘보혈’이라 부릅니다.

    나무에 달린 자, 저주 아래 서신 예수님

    본문 22~23절은 말씀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고대 사회에서는 흉악한 사형수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공동체 전체에 경계로 삼고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달린 자는 곧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달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원래 그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야 할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였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내 뜻대로 살며 이웃을 미워하여 영적으로 살인한 우리야말로 저 수치스러운 나무 위에 달려야 할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신명기 21장 23절을 그대로 인용하며 복음의 정점을 터뜨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와 저주가 그분께 쏟아부어졌고, 예수님은 그것을 온몸으로 흡수하셨습니다.

    핏값으로 산 자리

    사실 그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공의를 받아내야 할 자는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차마 나를 십자가에 매달 수 없으셨기에, 독생자 예수님을 대신 매달게 하셨습니다.

    본래 죽을 죄를 지어 나무 위에 달려야 할 사람은 우리였는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 갈보리 언덕 거친 나무에 대신 매달리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결코 값싼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저주받으신 예수님의 그 핏값으로 산 자리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는 깊이만큼 우리는 성장할 수 있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해 저주의 나무에 달리신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사도행전 17장 아레오바고 설교 – 세속 도시에 울려퍼진 복음

    사도행전 17장 아레오바고 설교 – 세속 도시에 울려퍼진 복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진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지난 주일 3부 예배를 마치고 5박 7일간 다녀온 인도네시아 선교 여정 가운데, 이 질문이 마음 깊이 남았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9월 첫 번째 주일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번 선교는 여러분이 성경책 천 권을 보내주시고 기도로 함께해 주신 덕분에 뜻깊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그 여정 가운데 마음에 새긴 질문으로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인도네시아 순바섬에서 발견한 명목상 신앙의 그림자

    작년에 인도네시아 순바섬을 방문했을 때, 성도들에게 성경책이 없다는 사실이 의아했습니다. 알고 보니 인도네시아는 주민등록증에 여섯 개 공식 종교 중 하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는데, 공산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제도 때문에 사람들은 불이익을 피하려고 아무 종교나 선택해야 했습니다. 순바섬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개신교란에 동그라미를 많이 쳤고, 그 결과 명목상의 개신교인은 많지만 성경책도 복음도 모르는 이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고, 올해 교회 오십 주년을 맞아 천 권의 성경책을 그 땅에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마을마다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돌짝밭 같은 마음도, 길가와 같은 마음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 반드시 옥토 같은 마음이 있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한국 교회에도 있는 명목상 신앙

    그런데 이는 인도네시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종교를 물으면 그냥 개신교라 답하지만 말씀을 읽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명목상 신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번 한 달 우리 교회의 주제는 ‘복음과 생명 문화’입니다. 세속 문화 속에서 어떻게 복음이 진짜 생명이 되는지, 그 첫 본문으로 사도행전 17장,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당신은 무엇에 격분하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와 베리아를 거쳐 아테네에 도착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에 따르면,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며 아덴에 머무는 동안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습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삼만 개 이상의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관광객이라면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사진을 찍었겠지만, 바울은 관광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격분했습니다.

    이 ‘격분’이라는 표현은 매우 과격한 감정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와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백성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격분하신 장면에서도 같은 단어가 쓰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거룩한 빡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분노 자체가 아니라 그 분노를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입니다. 바울은 거룩한 분노를 복음 전파의 동력으로 삼아 회당과 아고라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를 ‘말쟁이’라 조롱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반응한 이유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레오바고 법정과 아테네를 지배한 두 철학

    아테네 사람들은 이상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했습니다. 낯선 가르침을 전하는 바울이 눈에 띄자 사람들은 그를 아레오바고 의회로 데려가 심문했습니다.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17:21)는 말씀처럼, 지적 유희를 즐기던 이 귀족들 앞에서 바울은 오히려 예수와 부활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시 지배적이던 두 철학파가 있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불안 없는 상태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며 적당한 쾌락과 평정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의 ‘소확행’과 유사합니다. 스토아 학파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 ‘아파데이아’를 추구하며, 우주가 이성적 원리 ‘로고스’로 구성되어 있고 이성에 따라 살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우주 자체를 신으로 여기는 범신론에 가까운 사상이었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 이 두 학파가 오늘날 우리 문화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에피쿠로스주의는 ‘욜로(YOLO)’라는 소비 문화로, 스토아주의는 자기계발 우상으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쾌락의 허무함에 갇힌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구원하려는 지친 도덕주의자에게는 값없는 은혜를 줍니다.

    범신론과 불가지론이라는 두 가지 회피

    바울은 22절에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말하며 논리를 자신에게로 이끕니다.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은 선악을 구분할 필요를 없애고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산과 바다는 영적일 수는 있어도 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로마서 1장 25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 새긴 제단을 보고,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며 비겁한 불가지론을 걷어내고 확실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27절은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팔짱 끼고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가지론자들이 신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지게 될 도덕적 책임과 헌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면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사람들은 차라리 어둠 속에 머무는 편을 택합니다.

    부활,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

    바울은 30절과 31절에서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석가모니도, 마호메트도, 공자도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예수께서 장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확증해 주신 믿을 만한 증거입니다.

    나는 선택받았다 – 필자의 간증

    저 역시 대학 시절 ‘모든 길이 하나님께 통한다’는 종교다원주의를 두고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다시 만난 뒤 깨달은 것은, 많은 길 중 하나를 받는 것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는 단 하나의 길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그 유일한 길을 내어 주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구원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인격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신 것입니다.

    불모지에서도 열매는 있다

    사도행전 17장 34절은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고 전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삼천 명이 회심했지만, 아테네에서 바울의 설교에는 단 몇 사람뿐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천 명을 만나고 성경 천 권을 전했지만, 그 가운데 몇 명이 주님께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분명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같은 이들이 있을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믿을 만한 증거입니다. 쾌락과 이성의 통제 속에서 스스로 주인 되어 사는 삶이 똑똑해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결코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오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그 복음에만 있습니다. 이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한 주간 되시길 바라며, 다음 주일 예배에서 인도네시아 선교의 더 자세한 이야기와 함께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