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를 보면, 그 안의 신들은 인간처럼 질투하고 분노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성경도 하나님을 질투하고 분노하는 분으로 묘사하지만, 그것은 인간과 같은 선상의 감정이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요한일서를 통해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생명의 복음으로 오신 로고스’입니다. 일부러 ‘말씀’이라는 번역어 대신 원어 그대로 ‘로고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로고스는 철학의 원리가 아니라 생명이다
요한일서 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세기 후반, 스토아 철학이 대중적 인기를 끌던 시대에 ‘로고스’는 낯설지 않은 평범한 단어였습니다. 사람들은 로고스를 우주의 원리, 하나의 이치로 이해했고, 인간에게도 작은 로고스가 있어 이성으로 사고한다고 여겼습니다. 신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원리이며,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고스가 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요한 자신은 태초에 있지 않았지만, 3년간 함께했던 예수님이 바로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심을 깨닫고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보고 만졌다”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곧 원리가 아니라 로고스가 성육신하셨다는 선포입니다.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복음
당시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활발히 퍼져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특별한 영적 지식과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로고스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그 은혜를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특별한 지식을 얻어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결국 나 중심의 구원일 뿐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을 강조하고 육을 무시하는 이원론에 빠져, 예수가 실제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가 육체로 나타난 것처럼 ‘가짜로 현현’했을 뿐이라는 가현설(도세티즘)을 주장했습니다. 이와 닮은 현대의 위험이 구원파적 사고입니다. 깨달음을 절대화하고, 죄와 회개를 축소시키며, 성화의 과정과 거룩해져 가는 삶의 책임을 축소시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란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구원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까?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천국에 이르기까지 죄와 싸우는 영적 전쟁입니다.
성육신, 역사 속으로 오신 로고스 – 성경 번역의 역사
요한일서 1장 2절은 말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그 생명이 이 땅에, 1세기 팔레스타인의 한 유대인 남자로, 아람어를 사용하며 구체적인 역사 속에 오셨습니다.
이 성육신의 과정은 우리나라 성경 번역의 역사와도 닮아 있습니다. 쇄국 정책의 조선 땅에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며 전한 중국어 성경, 존 로스와 서상윤의 한글 누가복음, 이수정 선생의 마가복음 번역을 통해 말씀이 우리 언어로 들어왔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는 자유와 평등,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이해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로고스가 우리의 언어와 문화 속으로 들어오신 것은 낮아지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으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코이노니아, 공통점을 찾아가는 선교 – 인도네시아 순바섬 현장
요한일서 1장 3~4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귐’은 원어로 ‘코이노니아’, 곧 공통점(코이노스, common)을 찾아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번의 깨달음이 아니라, 주님과의 공통점이 점점 많아지며 인격이 변화되어 가는 성화의 여정입니다.
이번 인도네시아 순바섬 선교에서 그 코이노니아를 생생히 목격했습니다. 고아원 아이들은 한국어 찬양을 완벽히 외워 불렀고, 유학 경험 없는 현지 청년들이 훌륭히 통역을 해냈습니다. 700여 명이 모인 집회에서는 많은 이들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다리가 뒤틀린 아디 목사님은 오토바이로 6~7시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고, 도벽이 있었던 한 청년은 존재 가치를 깨닫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비포장길 산골 마을에서는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성경책을 받으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온몸을 떨며 앉지도 못했던 한 고등학생은 팀원들의 기도 후 일어나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순간이 로고스가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코이노니아의 현장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목사님들의 옷에는 마태복음 9장 35절이 쓰여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바로 그 말씀이 우리가 그곳에서 행하고 있던 사역 그 자체였습니다.
먼저 찾아오신 사랑
요한일서 4장 10절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어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딘가에 도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신 계시를 믿고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이성도, 감정도, 의지도 스스로 거룩함에 도달할 만큼 순수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뿐입니다. 남과 북 사이에, 우리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그 공통점을 찾아가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번 주에도 우리 가운데 오신 로고스, 생명이신 그분과의 코이노니아를 사모하며 다음 예배로 함께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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