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서 누군가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아무도 그 범인을 모릅니다. 이 죄책은 누가 짊어져야 할까요? 신명기 21장은 이 낯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오래된 율법 조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깊이 맞닿아 있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왜 이 사건이 십자가와 연결되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죄의 대가는 피로 갚아야 한다
신명기 21장 1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죄의 대가는 피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범인을 알 수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 목을 꺾어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그 피 흘림의 죄책이 공동체에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조치였습니다. 장로들은 그 송아지 위에서 손을 씻으며 고백합니다.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아무것도 모르는 암송아지의 피를 통해 공동체의 죄가 속죄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말씀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죄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생명, 곧 피로 덮어야 씻겨집니다.
암송아지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
아무 잘못도 없는, 멍에조차 메어보지 못한 암송아지가 성읍 사람들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고 목이 꺾여 피를 흘린 것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어린 양께서 우리의 알지 못하는 은밀한 죄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책을 담당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하물며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암송아지의 피가 육체를 정결하게 했다면, 흠 없으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양심까지 깨끗하게 하십니다.
원래는 내가 죽어 내 피로 속죄를 해야 했지만, 나 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대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그냥 ‘피’라 부르지 않고 ‘보혈’이라 부릅니다.
나무에 달린 자, 저주 아래 서신 예수님
본문 22~23절은 말씀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고대 사회에서는 흉악한 사형수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공동체 전체에 경계로 삼고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달린 자는 곧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달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원래 그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야 할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였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내 뜻대로 살며 이웃을 미워하여 영적으로 살인한 우리야말로 저 수치스러운 나무 위에 달려야 할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신명기 21장 23절을 그대로 인용하며 복음의 정점을 터뜨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와 저주가 그분께 쏟아부어졌고, 예수님은 그것을 온몸으로 흡수하셨습니다.
핏값으로 산 자리
사실 그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공의를 받아내야 할 자는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차마 나를 십자가에 매달 수 없으셨기에, 독생자 예수님을 대신 매달게 하셨습니다.
본래 죽을 죄를 지어 나무 위에 달려야 할 사람은 우리였는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 갈보리 언덕 거친 나무에 대신 매달리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결코 값싼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저주받으신 예수님의 그 핏값으로 산 자리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는 깊이만큼 우리는 성장할 수 있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해 저주의 나무에 달리신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