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우리 교회는 베트남 선교를 앞두고 있습니다. 여전히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나라를 향해 복음을 들고 가기 전,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공산주의 사상과 기독교 복음은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나라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공산주의가 향하는 방향은 같기에, 오늘은 그 본질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공산주의라는 철학과 사상을 주의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공산주의는 노동자에게 ‘의식’이 없다고 전제하고, 그 의식화의 출발점을 종교 비판에서 찾습니다. 종교를 지우고 그 자리에 공산 사상을 채워 넣으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는 사슬 외에는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외치며 당시 자본주의의 고통 속에 있던 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몰락했고, 지금도 공산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나라들은 대체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국 헛된 속임수, 초등 수준의 철학일 뿐입니다.
해방 후 한반도에서도 이 이념 전쟁은 치열했습니다. 북한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사람은 약 150만 명, 반대로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은 13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1946년 미군정 조사에서도 남한 사람들은 무상분배보다 자본주의 방식의 유상분배를 지지했습니다. 사상의 선택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북한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2. 공산주의는 무신론이라는 하나의 신앙이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이 시작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처럼, 공산주의 사상은 철저히 무신론적 유물론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14:1) 그러나 하나님을 없애려는 그 자리에는 결국 공산당이, 혹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이 들어섭니다. 기독교를 전체주의라 비판하던 공산주의가 결국 전체주의로 전락하는 이유입니다.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템플이 공산주의를 ‘기독교 이단’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종교학에서 공산주의를 하나의 세계 종교로 분류하는 것 역시, 무신론 자체가 ‘무신론이라는 믿음’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를 만났을 때 쉽게 개종할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학습된 신념일수록 더 견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는 유일신론 위에 서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사람의 누더기를 벗고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3. 공산주의적 성경해석을 경계하라
초대교회를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통용’이라는 단어가 그 근거로 쓰이지만, 이는 은혜받은 성도들의 자발적 나눔이었지 강제적 재분배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레닌은 ‘우리는 속임수와 불법, 진리의 은폐 같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을 만큼, 공산주의는 혁명을 위해 폭력과 거짓을 정당화합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성경 본문이 이념에 맞게 왜곡 번역된 사례까지 있습니다.
또 하나 경계할 것은 ‘탐심’과 ‘시기’를 감추는 방식입니다. 십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고 말하며 개인의 정당한 소유를 인정합니다. 기독교는 ‘공유’를 말하지만 소유를 획일적으로 나누는 ‘공산’을 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의 힘은 바로 이 탐심과 시기라는 인간의 근원적 죄성에 반응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고전13:4) 초대교회는 원시 공산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공동체였습니다.
4. 복음의 혁명, 내면에서 바깥으로
기독교 복음은 ‘outside in’이 아니라 ‘inside out’입니다. 제도나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 시작되는 혁명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소유와 욕심이 저절로 작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1953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Communism’s Challenge to Christianity’라는 설교에서 공산 혁명이 왜 일어났는지를 물었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처럼 오병이어의 마음으로 먼저 떡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배고파지는 떡이 아닌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이번 주 베트남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념이 아닌 생명을 전하는 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무엇이 나의 주인 자리를 넘보고 있는지 돌아보며, 다음 주일 예배에서 함께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