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4장 강해 – 마지막 때 교회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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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의 한국어 번역은 "안"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로마의 박해를 피해 도망치던 베드로는 반대편에서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십자가를 지시려 로마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 짧은 만남 이후,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로마로 들어갔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두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때는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 곧 2천 년 동안,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베드로전서 4장 7~11절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아멘.”

박해의 시대, 베드로가 쓴 편지

베드로전서는 갈대라는 뜻의 ‘시몬’에서 바위라는 뜻의 ‘베드로’로 이름이 바뀐 사도가, 노년에 초대교회를 향해 쓴 편지입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AD 64년 로마 대화재 사건 이후, 네로 황제는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기독교는 신흥 이단처럼 여겨졌고, 성찬을 오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식인 종교’라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콜로세움에서 맹수의 먹잇감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인간 횃불로 사용되는 참혹한 일까지 당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베드로는 유언과 같은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은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쿠오바디스 – 도망치지 않는 부르심

‘마지막’이라는 헬라어 ‘에스카토스’는 역사의 결말 부분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마지막이라는 말에 저마다 다르게 반응합니다. 어떤 이는 쾌락에 빠지고, 어떤 이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합니다.

앞서 나눈 베드로의 일화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로마의 박해가 심해지자 성도들은 베드로에게 피신을 권했습니다. 베드로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이유였습니다. 마지못해 로마를 떠나던 그는 반대편에서 오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다시 십자가를 지시려 로마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처럼 죽을 자격조차 없다 하여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병상에서 만난 희망

최근 교통사고로 6개월째 병상에 누워 계신 한 성도님을 심방했습니다. 기도에 관을 삽입해 말도 잘 못하시고, 한쪽은 마비되어 힘드셨지만 정신은 또렷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말 죽고 싶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쭤보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살려두셨을까요? 머리가 살아 있기에 몸도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얼굴에 희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옆 침상의 다른 환자분도 부러웠는지 자꾸 저를 부르셨습니다. 낫으면 교회에 나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병상에서든 박해의 자리에서든,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감당하라고 말씀합니다.

목적으로서의 마지막, 그리고 복음의 기회

‘에스카토스’에는 시간의 순서만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33년을 사셨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몇 년을 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의 시간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국제사역부가 시작되어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주변 캠퍼스의 외국인 학생들도 함께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시대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결말을 아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 교회가 사는 법 – 기도, 사랑, 대접, 봉사

오늘 본문은 마지막 때 교회가 살아가는 네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겟세만동산에서 “깨어 기도하라” 부탁받았지만 실패했던 베드로는 이 말씀을 쓰며 자신의 실패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원어는 ‘구원’과 ‘생각’의 합성어로, 우리의 생각을 구원해내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영이 깨어날 수 없고, 영이 깨지 않으면 세상 문화에 휩쓸리게 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습니다. ‘뜨겁게’라는 원어는 현악기의 줄을 끝까지 팽팽하게 당기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나오는 호르몬 옥시토신은 혈관을 넓히지만, 미워하고 외로울 때는 혈관이 좁아진다고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반복적으로 덮어줍니다.

셋째, 대접입니다. ‘대접’의 원어는 ‘사랑(필로스)’과 ‘나그네(크세노스)’의 합성어로,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랑을 뜻합니다.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오가는 사역자들을 성도의 가정에서 대접해야 했습니다. 잠자리뿐 아니라 식사까지 챙겨야 했으니 그 수고가 자칫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나그네를 원망 없이 사랑하고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환대이며,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실천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대접을 실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차량 봉사, 주방 봉사, 목요일 아브라함의 식탁 후 설거지까지 자기 시간을 쪼개어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 청소를 위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든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원망 없는 섬김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대접이며, 이것이 교회를 세워갑니다.

넷째, 봉사입니다. 은사는 재능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며 마음의 감동입니다. 청지기는 소유권이 아닌 관리권만 가진 자입니다. ‘봉사(디아코노스)’는 먼지 날리며 섬기는 종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동호회가 아니라 동역회입니다. 동호회는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모임이지만, 동역회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재능을 가지고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섬기는 자리입니다. 미용 봉사팀이 기도로 시작해 요양원 어르신들을 섬기고, 독서 모임을 통해 새 신자가 등록하는 등 다양한 섬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결론 – 오직 하나님께 영광

본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기도하고,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생각하며 기도하라 권면했고, 자신의 부족한 사랑을 생각하며 뜨겁게 사랑하라 권면했습니다.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우리를 향한 진심 어린 당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도 위축되지 말고 하던 대로 하십시다.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원망 없이 대접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십시다. 이것이 마지막 때 교회가 사는 법입니다. 다음 주 예배에도 함께 나와 이 은혜를 나누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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