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3편, 형제 연합의 복 – 보배로운 기름처럼 복스러운 이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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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의 한국어 번역은 "안"입니다.

남극의 황제펭귄은 영하 50도의 혹독한 겨울을 ‘허들링’이라는 방법으로 견뎌냅니다. 수백 마리가 바짝 붙어 서로 벽이 되어주고, 안팎을 순환하며 체온을 나눕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펭귄처럼 단순하게 서로를 품게 만드셨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함께 살면서도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펭귄만도 못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순환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일까요? 오늘 시편 133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통해 형제의 연합이 왜 그토록 어렵고, 동시에 왜 그토록 아름다운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형제 갈등의 역사와 사랑의 비용

시편 133편 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드는 열두 지파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 시를 지었습니다. 사사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파 간의 지긋지긋한 갈등을 마무리하고, 마침내 하나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목격한 감격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 형제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첫 살인의 비극을, 이스마엘과 이삭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을, 에서와 야곱은 장자권을 둘러싼 다툼을, 요셉의 형제들은 배신을 남겼습니다. 형제의 연합은 성경 어디서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연합’이라는 단어는 하모니, 곧 화음을 뜻합니다. 오케스트라가 조율할 때는 소음에 가깝지만 지휘자의 손끝에서 하나의 화음이 됩니다. 성경 원어로 ‘아름다운고’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실 때 쓰인 바로 그 단어, ‘토브’입니다. 형제의 연합은 창조의 아름다움에 견줄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연합의 비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라”(마 5:39-41). 이는 갈등을 끝까지 끌고 가는 비용보다, 먼저 사랑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게 든다는 말씀입니다.

한국 사회의 갈등 비용이 GDP의 최대 27%에 달한다는 통계처럼, 우리는 지불하지 않아도 될 비용을 너무 많이 치르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가족이나 친척 중에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당장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를 위해 기도 한마디, 빈말이라도 좋은 말 한마디를 건네보십시오. 그것이 시작입니다.

보배로운 기름처럼

2절은 아론 제사장의 위임식 장면을 그립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향유가 머리에서부터 수염을 타고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모습, 대제사장 한 사람이 온 지파를 대표하는 이 장면이 다윗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기름부음은 야곱의 돌베개 사건(창 28:18)에서 처음 등장하며, 하나님께 성별되고 구별됨을 뜻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기름부음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때 우리도 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연합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있는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성령으로 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복스러운 이슬처럼

3절 전반부는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헐몬산의 눈과 이슬은 건기에도 땅을 적시고 만나와 함께 광야를 채웠던 은혜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32장에서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라고 노래했고, 다윗 역시 성전으로 올라오는 백성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슬처럼 맺히는 것을 보며 감격했습니다.

거기서, 영생의 복을 명령하시다

3절 후반부,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어쩌면 ‘거기서’일 것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산이나 시온산 자체가 아니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복을 명령하십니다.

옆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데도 사랑하려 애쓰는 그 자리, 손해를 보면서도 견뎌내는 그 가정, 갈등이 있어도 사랑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그 교회 공동체,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광야의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것을 먹은 이들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만나와 달리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의 떡이 되시어, 그를 믿고 받아먹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뺨을 맞아도 겉옷을 내어주어도, 그 사랑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며 살아가는 자리에 주님은 복을 명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번 주일예배에서 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름부음의 은혜를 함께 나누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자리로 함께 나아가시길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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